그대 생의 솔숲에서

그대 생의 솔숲에서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저만큼 지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여

거기 이는 바람이여

찬 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눈뜨리

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른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겨울, 채송화씨

겨울, 채송화씨

아내는 나를 시골 집에다 내려놓고 차를 가지고 돌아갔다.

갑자기, 가야 할 길과

걸어야 할 내 두 발이

흙 위에 가지런히

남는다.

어머니 혼자 사시는 우리집 마당에 발길 닿지 않는 땅이

이렇게 많이 있다니? 가만가만 돌아다니며 마당 가득 발자국을

꼭꼭 찍어본다. 이 마당에서 벌거벗고 뛰어 놀던

내 형제들과 이웃 아이들의 벌거벗은 웃음 웃음소리 대신

어머니는 해마다 발 디딜 곳 없이 마당 가득 화려한

채송화꽃을 피워놓는다.

정말 환하다. 달빛은 환해서 세상의 모든 욕망을 죽이고

나무만을 따로따로 달빛 아래 세운다.

달빛은 모든 것들을 떼어놓고 너희들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그렇게 보여준다. 물만 흐를 줄 안다. 발밑에서 참지 못하고

깔깔대는 까만 채송화씨들이 세상을 걷느라 두꺼워진 내 발바닥

깊은 속살을 찌른다.

씨만이 세상의 정곡을 찌른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길들을 거둔다.

세상의 소식이 닿지 않는 이 간단명료한 사랑을 나는 알고 있다.

거짓 없는 사랑은 현실이다.

이 세상 모든 살구멍이 열리고 뼈마디가 허물어져내리는 사랑을

나는 안다.

시를 써야지. 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일하는 사람들이 꽃이 된다.

고된 노동으로 이룬 따뜻한 어머니의 잠 속으로 들어가 자고 싶다.

어머니의 깊은 잠만이 나를 깨울 꽃이다.

수백 수천 대의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에 깔려 잠을 자던 내가 창호지 문지방에서

꼬물거리는 겨울 벌레 소리에도

눈을 뜬다.

낡은 내 몸

어디에

새로

뚫릴

귀와

눈이 있었는가. 나는 깨끗하게 죽을 것이다.

내 죽었다가,

수백 번도 더 죽었다가 살아났던

내 청춘의 오래된 이 방에서

나는 오랜만에 달빛으로 죽는다.

저 황량한 거리,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 같은 모든 거짓 사랑과 예술 속에서 미련 없이 걸어나와

누구도 닿지 않는 먼 잠을 자리.

저 물소리 끝까지 따라가 잠자는 겨울 채송화씨,

그 끝에서 나는 자고 깨어

그리운 우리집 마당에 채송화꽃으로 오리.

오, 죽지 않고 사는 것은 거짓뿐이니. 너를 따라온 모든

낡은 길들을 거두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