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골짜기에서

겨울 골짜기에서

낮은 가지 끝에 내려도 아름답고

험한 산에 내려도 아름다운 새벽눈처럼

내 사랑도 당신 위에 그렇게 내리고 싶습니다.

밤을 새워 당신의 문을 두드리며 내린 뒤

여기서 거기까지 걸어간 내 마음의 발자국 그 위에 찍어

당신 창 앞에 놓아두겠습니다.

당신을 향해 이렇게 가득가득 쌓이는 마음을 모르시면

당신의 추녀 끝에서 줄줄이 녹아

고드름이 되어 당신에게 보여주겠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바위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그래도 당신이 저녁산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바람을 등에 지고 벌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했었노라는 몇 줄기 눈발 같은 소리가 되어

하늘과 벌판 사이로 떠돌며 돌아가겠습니다.

겨 울 나 기

겨 울 나 기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 주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잃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