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준(金鍊俊) – 함남 북청

성명 김연준
(金鍊俊)
독립운동계열 노령방면
출생 (1896) 출생지 함남 북청
사망 (1923) 사망장소
훈격 애족장 훈격년도 2002
공적내용

  함남 북청(北靑) 사람이다.
  1920년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대대적인 한국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그해 4월과 10월에 걸쳐 이른바 4월참변과 간도토벌(間島討伐)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과 연해주 등지에 있던 한국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이만을 거쳐 볼세비키가 장악하고 있던 노령(露領) 자유시(自由市 스보보드니, 혹은 알렉세예프스크)에 집결하였다. 1921년 3월까지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부대는 노령지역의 김 표도르 등의 이만군대, 최 니콜라이의 다반군대, 박 그레고리 등의 독립단(獨立團), 임호(林虎)와 고명수(高明秀)의 한인니항군대(韓人尼港軍隊 후일 사할린의용대로 개칭, 일명 사할린부대), 오하묵(吳夏默)과 최고려(崔高麗) 등의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 일명 自由大隊)와 간도지역의 최진동(崔振東) 등의 총군부(總軍府), 안무(安武) 등의 국민회군(國民會軍), 홍범도(洪範圖) 등의 독립군, 서일(徐一) 등의 군정서 등이었다.
  당시 자유시는 이르쿠츠크파의 문창범(文昌範) 등이 이끄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극동공화국(極東共和國) 인민혁명군(人民革命軍) 산하에 한인보병자유대대를 조직하고, 오하묵을 대대장에 임명하고 군을 통솔하고 있었다. 따라서 1920년 10월 한인니항군대의 자유시 도착 후 이르쿠츠파의 대한국민의회와 극동공화국 한인부를 장악하고 있던 이동휘(李東輝) 계열의 상해파(上海派) 간에 니항군대의 자유대대 편입문제와 군 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 즉 문창범 등이 한인 독립군부대를 자유대대 산하에 편입하였던 데 대해 이동휘 계열의 박애(朴愛) 등은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니항군대를 사할린의용대로 개칭하고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독립군부대를 그 관할 아래 두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이동휘 계열의 한인부에서 임명한 연대장 그레고리예프와 군정위원장 박 일리아는 종전 문창범 등이 자유대대에 편입시켰던 니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지역 독립군부대 역시 강제 이주시켰으며, 불응하는 자유대대 장교들을 니항군대와 다반군대로 하여금 체포 혹은 무장해제시켜 지방수비대로 강제 편입하였다.
  이에 따라 자유대대의 오하묵 · 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교섭하여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臨時高麗革命軍政議會)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윌린, 부사령관에 오하묵, 군정위원에 김하석(金夏錫) · 채성룡(蔡成龍 )을 임명하였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갈란다라시윌린은 7일 자유시의 전 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8일 박 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1921년 6월 27일 사할린의용대 연대장 그레고리예프가 투항하자, 6월 28일 총사령관 갈란다라시윌린은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를 파견하여 사할린의용대의 무장을 해제하도록 하였으나, 사할린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이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의용대는 전사자 ·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으며, 이것이 이른바 자유시참변이다.
  1921년 자유시참변 당시 이만군대 장교로 있던 그도 러시아 적군(赤軍)에게 체포되어 이르쿠츠크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3년경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朝鮮日報(1923. 6. 24.)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430面

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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